수넴여인의 사랑

수넴여인의 사랑

성경에 보면 한 평범한 수넴 여인의 이야기가 아름다운 모습으로 읽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하게 한다. 다른 성도들은 어떻게 볼지 모르지만 특별히 오랫동안 목회를 한 그리고 해오는 사람들에게는 좀더 색다르게 느껴지는 이야기가 바로 수넴 여인의 이야기다.

왕하 4:8-13 [8] 하루는 엘리사가 수넴에 이르렀더니 거기에 한 귀한 여인이 그를 간권하여 음식을 먹게 하였으므로 엘리사가 그 곳을 지날 때마다 음식을 먹으러 그리로 들어갔더라 [9] 여인이 그의 남편에게 이르되 항상 우리를 지나가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노니 [10] 청하건대 우리가 그를 위하여 작은 방을 담 위에 만들고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두사이다 그가 우리에게 이르면 거기에 머물리이다 하였더라 [11] 하루는 엘리사가 거기에 이르러 그 방에 들어가 누웠더니 [12] 자기 사환 게하시에게 이르되 이 수넴 여인을 불러오라 하니 곧 여인을 부르매 여인이 그 앞에 선지라 [13] 엘리사가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너는 그에게 이르라 네가 이같이 우리를 위하여 세심한 배려를 하는도다 내가 너를 위하여 무엇을 하랴 왕에게나 사령관에게 무슨 구할 것이 있느냐 하니 여인이 이르되 나는 내 백성 중에 거주하나이다 하니라

우리가 잘 아는대로 엘리사는 엘리야의 대를 이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거칠고 반역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어려운 사역을 하고 있었다. 사실 알고 보면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존경하는 것처럼 ( 혹시 부러워하고 존경한다면) 선지자의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잘못되어갈 때 그 잘못을 이야기 해주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며 사람들 또한 즐거워하지 않는다. 엘리사는 그러한 일을 하였고 그 일을 하기 위해 오가며 수넴 여인의 집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수넴 여인의 생각은 그에서 그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선지자를 가끔 대접하는 일로도 힘들 수도 있고 또 그 정도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데 이 여인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이 여인이 선지자의 어려운 삶을 이해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우리는 알수가 없다. 하지만 위의 말씀에서 우리는 몇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이 여인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러한 일을 하였다는 것이다.

엘리사가 그를 불러서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에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사실 엘리사는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보다 더 영향력이 있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엘리사가 여인에게 “ 왕에게나 군대 장관에게 무슨 구할것이 있느냐?” 고 물었을 때에 그는 충분이 모든 면에서 이들을 통하여 여인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었다. 그러나 여인은 무엇을 바라고 엘리사를 도운 것은 아니었다. 수넴 여인은 남편에게 말하여 가끔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자기 집 앞을 지나는 엘리사를 위하여 담 위에 조그만한 방을 하나 마련하였다. 그리고 거기에 선지자가 편히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마련해 두었다. 엘리사가 방에 들어가 누워 가만히 보니 여인이 자기를 생각하는 생각이 너무 기특하였다. 준비한 모든 것 하나 하나에 하나님의 사람을 위한 사랑이 베어 있었다.

왜 하나님은 이 수넴여인의 이야기를 이곳에 기록하게 하셨을까?

나도 개인적으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고 할수 있는 30 여년동안 목회를 해오면서 수넴 여인과 같은 사람들을 가끔씩은 만나 보았고 또 만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목회가 너무 너무 즐겁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은 아마도 남들이 받지 않은 특별한 은사와 육체를 받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를 포함해서 수많은 목회자들이 목회의 즐거움과 더불어 어려움도 많이 만나고 있다. 때로는 허허벌판에 홀로선 마음이 들 때도 있고 사랑하는 성도들의 사랑으로 인하여 무한한 행복감을 맛볼 때도 있다. 그러나 그가 진정한 목자라고 한다면 전반적으로 목회의 길은 외로운 길이고 험란한 길인 것은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목자들이 인정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아는대로 성공적인 목회를 한 위대한 사도 였지만 하나님의 사도로서 곳곳에 힘들었던 그의 심정이 나타나 있다.

고후 5: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딤후 4: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하지만 사도 바울의 서신서들을 읽어보면 가끔 이 수넴여인과 같은 성도들로 인하여 큰 위로와 겪려를 받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본다.

골 4:11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들은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현대를 사는 목자들도 만일 그가 영적인 가치관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교회를 이끌어 간다고 하면 그 어느 때보다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목자들이 그 어려운 길에도 때때로 힘을 얻고 위로를 얻는 것은 바로 수넴여인과 같은 성도들이 곳곳에 있어 조그만한 방(?)을 마련해 두고 그곳을 지나는 목자들로 하여금 쉼을 얻게 해 준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냥 순수하게 하나님께 속한 종이라는 생각에서 그 종들을 생각하는 그들의 오밀조밀한 생각들이 드러난 사랑의 섬김을 보면서 목자들은 엘리사가 느꼈던 동일한 마음으로 위로를 받게된다. “네가 이같이 우리를 위하여 생각이 주밀하도다 ”

아마도 하늘나라에 가면 이들이 그 누구보다. 더 큰 칭찬과 위로를 받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 10: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진정한 자녀사랑

진정한 자녀사랑

우리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에 아직 들어가기 전에 고향에 다녀오는 길에 어느 식당에 들렸는데 우리아이들을 사랑스런 눈으로 지켜보던 나이가 좀 지긋한 식당 사장님이 아이들이 참 예쁘게 생겼다고 말을 하여서 나는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힘들다고 말하였다. 그때 그 식당 사장님이 그래도 그때가 좋은 때입니다 라고 말을 하였었는데 나는 그때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이들이 점점 커가면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이들이 빨리 자라서 부모의 어깨위에 있는 무거운 짐을 좀 내려놓을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하지만 다는 아니라 할지라도 대부분의 부모에게 있어 그것은 하나의 헛된 꿈에 불과할 뿐이다. 자녀들이 나이를 먹어갈수록 부모에게 주는 짐의 무게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자녀들이 학교를 다닐 때는 학비를 대느라고 허리가 휜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녀들이 학교를 마치고 직장을 잡으면 이제 부모는 돈을 세는 즐거운 일만 남은 것 같은데 막상 그렇지 않고 자녀들은 전에 보다 더 무거운 추를 부모의 등에 지워 놓는다. 자녀들이 장가가고 시집가면 부모가 이제 그 무거운 짐을 벗게 되는 것일까 ?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어떤 자녀들은 아이들을 낳아 기르다 이혼을 하고는 아이들을 부모님께 맡겨두고 늙은 부모님으로 하여금 평생을 손주들과 자녀들을 돌보는데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자녀들에 대한 부모의 진정한 사랑은 무엇일까?

요즈음 젊은 세대들을 보면 자식사랑에 (?) 자기들의 목숨을 거는 것 같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자식 사랑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올림픽 경기를 보는 것 같다. 자기들이 바라는 자식의 성공을 위하여 자신들의 모든 것을 희생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자식을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식을 통하여 자신의 꿈을 이루려는 것일까? 아니면 자식의 진정한 행복보다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체면을 세울 수 있는 성공을 이루려는 것일까?

우리는 무엇에 근거해서 자식을 성공시키려고 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영적인 가치관에 의한 성공인가 ? 아니면 사탄이 세상 사람들을 마비시켜 놓은 거짓에 의한 세속적인 가치관에 의한 성공인가?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동원해서 자신의 자식 사랑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순수하게 영적인 가치관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고 항변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의 신앙 양심에 손을 얻고 정직하게 생각해 본다면 그 깊은 내면에 나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발견 할 수 있다. 우리의 영적인 안목이 흐려진다면 양심에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그 동기가 영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도 있다. 나는 그동안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영광이라는 이름아래서 자신들안에 있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의 욕구를 채우는 것들을 지켜보았다.

나도 자식을 둘을 키워왔고 또 지금도 돌아보고 있는 입장에서 이것은 쉽게 벗어 버릴 수 없는 아주 지독하게 끈질긴 그래서 잘라 내려고 노력해 보지만 쉽게 잘라지지 않는 욕심의 끈인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죄가 내안에서 자주자주 아주 근사면 변명을 만들어 나를 속이고 있다 그것은 바로 나의 이기심을 채우면서도 그것이 곧 주님을 위한 것이라고 속삭이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의 자녀들이 나의 소원(?)을 좀 이루워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그리고 그것이 주님께도 영광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롬 7:11)

하지만 우리가 자식을 사랑하는데 있어 반드시 지켜야할 하나의 원칙이 하나있다. 그것은 자식에 대한 사랑이 아무리 크고 강하다 할지라도 삶에 있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우선순위를 범하는 사랑이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우선순위는 무엇일까? 하나님은 그 삶의 우선순위에 대하여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 22:37-38 ) 주님은 그것을 우리들에게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셨다.

마 10:37-39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그것은 그 무엇이든지 그것이 하나님보다 앞선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자식의 사랑이 하나님보다 앞선 것이어서는 안된다. 구원받은 성도라면 각자에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이 있다. 자식을 잘 양육하는 것도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맡겨주신 사명 중에 하나이지만 그 사명 외에도 우리 각자를 불러 구원시키시고 우리 각자에게 맡기신 사명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이루어야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고전 12:11)

오래전 그러니까 우리 아이들이 아직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떤 주님을 깊이 사랑하시는 형제님으로부터 미국에 진정으로 일꾼이 필요하고 또한 미국은 아이들을 잘 키울 수 있는 좋은 곳이기 때문에 영주권을 얻는데 도와줄 수 있으니까 아이들을 미국으로 데리고 와서 교육시키도록 하라는 권고를 받게 되었다. 진정으로 우리를 생각해서 해주시는 도움의 제안이었다. 솔직히 유혹이 되는 제안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데 있어 크게 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자녀들을 미국에 데리고 와서 키우면 자녀들은 잘되겠지만 ( 어쩌면) 주님이 내게 맡기신 사명은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때 나는 주님이 내게 맡기신 사명과 자녀들을 미국에 데리고 와서 교육시키는 것 ( 자식 사랑)사이에서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결국은 자녀교육도 중요하지만 주님이 내게 맡기신 사명을 저버릴 수 는 없었다. 그래서 어쩌면 나는 내 자식들을 성공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저버렸는지도 모른다. 내가 비록 내 자녀들이 미국에서 공부하여 성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저버렸는지는 모르지만 오늘날 나는 그러한 나의 결정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는다. 나는 부모로서 자녀들을 잘 양육해야할 책임이 있기는 하지만 내게도 내가 이루어야할 주님이 내게 맡기신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자식을 잘 키우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첫째 되는 사명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아무리 자녀 교육이 중요하다고 말해도 우리가 이루어야할 우리 각자에게 맡기신 사명이 우리에게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오늘날 아이들을 키우는 그리스도인 부모들 중에는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라고 말한 사도 바울의 말을 ”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자녀들을 성공시키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마음이 안타깝다.

나는 요즈음 자녀들을 키우는 부모들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해주고 싶다.

그것은 당신이 지금 당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여 당신의 자녀를 당신이 원하는 대로 성공시켰다고 해도 성공한 이후에 당신의 자녀의 마음속에 주님이 첫째자리에 계시지 않는다면 그 성공은 결코 진정한 성공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래전 어떤 교회 장로님이 내게 말씀하신 탄식 아닌 탄식이 생각이 난다. 이 장로님은 좋은 직장에 다니시는 관계로 자녀들을 사회적으로 잘 키우실 수가 있었다. 아이는 어릴 때부터 학원에 열심히 다녔고 공부를 아주 잘해서 여러 가지 대회에서 입상을 하여 전국적으로 이름도 알려지게 되었고 그것이 부모의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다. 그래서 자녀의 보다나은 발전과 성공을 위해 자신의 직장은 지방에 있었지만 주말 부부를 하면서 까지 희생하며 집을 서울로 옮기고 자식 교육에 힘을 쏟아 부어 결국 아들을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그런데 그렇게 까지 성공한 아들은 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는 교회에 대해 흥미를 잃더니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아예 주님을 멀리하고 세상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그분의 탄식은 이것이다. 결국 그들의 그동안의 모든 수고의 결과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이 과연 성공인가?

주일날 자녀들의 일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기초가 돠며 진리의 기둥과 터가될 하나님 말씀에 대한 공부와 하나님을 첫째 자리에 두며 또한 구원받은 자들의 의무인 예배를 등한이 하고 그들을 학원으로 내모는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안에 무엇을 심어 주고 있으며 또한 무엇을 심어 주려는 것일까? 공부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리고 곧 시험이 있기 때문에 중고등부에 참석하는 것도 절제시키는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의 마음에 무엇을 심어주려는 것이며 또한 어떤 성공을 그들을 통해 이루려는 것일까 ? 주일날 예배가 끝나기가 무섭게 그자녀들을 태우고 학원으로 달려가는 부모들은 그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며 무슨 성공을 거두려는 것일까?

먼저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들이 생각하여야 할 것은 자식사랑이라는 것 또는 자식 성공이라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사명은 소홀이 하고 있지는 않는지 그리고 자식 사랑과 성공이라는 이유로 자식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첫째자리에 계시는 것을 빼앗고 세속적인 성공을 그 첫째자리에 앉게 하도록 유도하고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 입으로 하는 교육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된 당신의 삶으로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교육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 세상 적으로 성공한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결혼 하는데 는 별 문제가 없는데 영적으로 성공한 그래서 정말 영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들 그러나 세상 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결혼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세상 적으로 성공하도록 그래서 세속적인 가치관이 그 마음속에 우선순위를 차지하도록 열심히 양육한 그리스도인 부모들의 수고의 결과일 것이다. 오늘날에 교회 안에서 세상 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영적으로 좀 부족해도 인정을 받는데 영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세상 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인하여 전자에 비해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 그리고 그들의 자녀교육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

진정한 자식 사랑과 자식성공은 과연 무엇일까?

유능한 교육자로. 음악가로. 사회사업가로. 기업가로 정치인으로 유능한 의사로 변호사로 키우는 것일까? 그런데 만일 그들이 그렇게 훌륭하게 된 다음에 그들이 마음속에 주님이 첫째자리에계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 성공을 누구를 위해 사용하게 될까? 하나님의 이름이나 영광이 아니라 자기 이름이나 가문 그리고 그 부모의 이름을 빛내는데 사용하지 않을까?

진정한 자식 사랑과 성공

그렇다면 이 땅에서 하는 세상적인 교육은 중요하지 않으니 등한이 하자는 이야기 인가? 아니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녀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첫째 자리에 계시도록 교육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의 입이 아닌 삶에서 가르치자는 것이다. 아이들을 주일날은 그 어떤 일보다 교회에 참석해 말씀을 공부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며 그리스도인들과 교제하며 사귀게 하고 아무리 학교 공부가 중요해도 청년회나 중고등부에 자녀들을 참석시켜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두는 것을 배우게 하며 사람이 떢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의 중요성을 배우게 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식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첫째 자리에 계시도록 양육하는 것이 아닐까 ?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고 우리가 말한 대로 하나님이 계신 것이 확실하고 앞으로 우리가 하나님말씀대로 하늘나라에 가서 영원히 살게 된다면 그것이 정말 성공적인 자식 교육이며 또한 사랑이 아니겠는가?

행 27: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하나님 우리의 아이들이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 위에 임하며 또한 우리 아이들의 마음속에 언제나 하나님이 첫째 자리에 계시게 하옵시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그들의 인생의 최대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그들이 되게 하옵소서” .- 아멘


안식일의 교훈

안식일의 교훈

안식 일은 맨 먼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과 그 모든 만물들을 창조하신 후에 즉 그의 모든 일을 다 마치신 후에는 그 다음날 쉬셨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날에 안식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창 2: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그리고는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날은 그들의 안식일이라고 말하지 않고 여호와의 안식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출 20:10-11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너무 힘드셔서 쉼이 필요하셨을까? 물론 그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날에 쉬셨고 그가 창조하신 피조물들 즉 사람들에게 안식일에 안식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자들은 죽이라고 명하셨다.

출 31:14-15 [14]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15]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그리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자를 말씀에 따라 죽였다.

민 15:32-36 [32]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류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33]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 앞으로 끌어왔으나 [34]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3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영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36] 온 회중이 곧 그를 진영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를 쳐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니라

물론 오늘날 우리들에게 안식일은 좀 다른 개념으로서 유대인들과는 다르다. 어떤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토요일의 안식일이 주일로 옮겨진 것은 아니며 유대인들처럼 안식일을 꼭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해방된 자들의 모임인 것이다.

롬 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롬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롬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

그래서 우리는 율법의 모든 요구에서 벗어난 자들로서 율법 즉 안식일 준수의 의무는 없다. 그리고 우리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로서 더더욱 율법의 지배아래 있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식일이 주는 교훈을 잊어버려서는 안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안식일의 교훈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오늘날 우리들이 안식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교훈은 크게 두 가지라고 본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교제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 육체의 쉼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도록 명하신 것은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이 두 가지 면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유익을 얻게 하기 위함인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나는 일주일에 하루 바쁜 일들을 잠시 미루어 놓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우리 영혼이 새로운 힘을 얻는 것이다. 옛날에도 그랬지만 오늘날 우리 사람들의 삶을 보면 모두가 너무 바쁜 스케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 영혼이 조용히 하나님 앞에 앉아 쉼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다. 그래서 우리 영혼은 많이 메말라 가고 있으며 많이들 힘들어 하고 있다. 우리는 안식일이 아닌 주일이라 할지라도 하루 동안 조용히 다른 일에 매달리지 않고 다른 일들을 모두 뒤로 미루어 두고 하나님 앞에서 그를 경배하며 그의 말씀으로 더불어 그리고 조용한 묵상을 통해서 그와 교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우리 영혼이 다음 6일을 살아갈 수 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주일날 그냥 교회에 나와 공부를 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모든 것을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안식일의 교훈은 그렇지 않다. 주일날에도 또 다른 바쁜 일정으로 인하여 자신의 영혼에 쉼을 누리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한 영적 회복을 어렵게 하는 경우들이 많다. 일주일에 하루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의 존전에 나가 그와 대화하고 그의 뜨거운 열기를 내 영혼에 가득 채워 일주일을 새롭게 그 힘으로 살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마치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하나님을 뵙고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이 빛난 것처럼 매주 주일만이라도 주님과의 좋은 교제와 사귐을 통하여 일주일 동안 험악한 세상과 직장생활을 통하여 더렵혀진 발을 씻고 (요13:10) 기분 좋게 새로운 주를 시작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다음으로는 우리 육체의 회복이다. 안식일의 교훈 중에 하나가 우리 몸이 6일 동안 힘든 일로 인하여 지처 있어서 쉼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에 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영과 육이 모두 쉼이 필요해서 안식일을 제정하신 것이라고 본다.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사람이 6 일 동안은 열심히 일하고 7일째 되는 날 육체에 쉼을 준다고 하면 훨씬 건강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돈이 많든 적든 죽을 때까지 쉬는 것을 알지 못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주일을 안식일이라고 말씀하시고 안식일을 범하는 자들을 바로 죽이신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어쩌면 인간의 수명이 더 길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쉬는 것도 좋지만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그 이유와 목적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주신 것은 영적인 것과 육적인 쉼에 그 목적이 있다고 본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위한 안식일을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땅도 쉬게 하셨고 자연도 쉬게 하셨다. 우리 몸도 영혼도 쉽 과 회복이필요하다. 우리 영혼의 쉼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그렇다면 우리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먼저는 우리가 주일날 우리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 그를 경외하며 그와 교제하므로 영적 충만을 얻는 것이다. 일주일 즉 다가오는 6일 동안 살아갈 영적 에너지를 주일날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못하면 우리는 6일 동안의 눈 코 뜰 수 없이 바쁜 일정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 그와 교제하며 영적인 힘을 얻을 기회를 얻기란 어려운 것이다. 사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매일 매일 그 필요한 힘을 주님께 얻지 못하고 일주일에 하루를 통하여 얻는다는 것이 맞는 말이 아니지만 오늘날 사람들의 삶을 보면 너무나 분주하게 살아가기 때문에 사실상 그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그것이 안 된다면 적어도 일주일에 하루 만이라도 우리 영혼이 힘을 얻는 영혼의 쉼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자녀들도 마찬가지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별을 보고 나가서 별을 보고 들어와야 하는 바쁜 공부 스케줄 속에서 쉼을 얻기란 어려우며 영적으로도 그 힘을 얻기가 어렵다. 그래서 주일만이라도 하루 종일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하며 말씀으로 무장하고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 또는 사귐을 통하여 힘을 얻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주일날까지 자녀들을 학원이나 공부방으로 몰아넣는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의 영적빈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안식일의 교훈을 우리들에게 적용해 보자면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 하루만이라도 다른 일에 매달리지 않고 우리 자신들과 자녀들이 주님 안에서 예배와 말씀 그리고 성도들의 사귐을 통하여 영육 간에 쉼을 얻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